본문 바로가기
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연맹체에 기초한 국가가 성장하다.

by 변교수 2023. 5. 20.
반응형

전근대 한국사의 이해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성립한 여러 정치 세력들은 서로 경쟁 교류하면서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실리를 추구하는 대외 정책을 펼치면서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다원적인 사회를 운영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대외 관계와 세계관이 변화하였고 사회와 경제에도 변동이 나타났다.

1. 고대 국가의 지배 체제
2. 고대 사회의 종교와 사상
3. 고려의 통치 체제와 국제 질서의 변동
4. 고려의 사회와 사상
5. 조선의 정치 운영과 세계관의 변화
6. 양반 신분제 사회와 상품 화폐 경제

 

1. 고대 국가의 지배 체제

철기를 사용한 부족이 주변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는 부여와 고구려가 성립하였다. 부여와 고구려는 모두 여러 지역 집단들의 연맹을 바탕으로 국가를 형성하였다. 부여에서는 장마와 가뭄으로 오곡이 익지 않으면 부족장들이 왕에게 책임을 묻기도 하였다. 고구려에서도 초기에는 대가들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였으나 점차 왕위 계승을 안정시키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1. 연맹체에 기초한 국가가 성장하다.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 출토되는 비파형 동검은 검의 아랫부분이 둥글고, 몸체 가운데에 돌기부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동검은 중국 동검과는 달리 손잡이와 칼날을 따로 만든 뒤 조립하였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비파형 동검과 같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하였다.

 

선사 문화의 전개

70만 년 전부터 만주와 한반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뗀석기를 사용한 구석기 문화가 성장하였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이동 생활을 하며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서 생활하였다. 1만 년 전부터는 신석기 문화가 시작되어 간석기와 토기2 제작이 이루어졌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한곳에 정착하여 농경과 목축 생활을 하였고, 씨족 단위로 마을을 형성하였다. 신석기 시대까지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발생하지 않은 평등한 사회였다. 만주와 한반도를 터전으로 생활하던 우리 민족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계열의 이주민들이 합쳐져 민족의 기틀을 이루었다.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한 고조선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만주 지역에서부터 청동기 문화가 시작되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생산력이 향상되고 마을의 규모가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계급이 발생하고, 군장이 등장하였으며, 집단 간 세력의 차이도 생겼다. 이러한 변화가 랴오닝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나타나면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성립하였다. 고조선은 정치적으로 우월한 환웅 집단이 여러 세력과 결합하여 성립하였고, ‘단군왕검이라는 제정일치의 지배자가 통치하였다. 고조선은 철기 시대인 기원전 4세기경 중국의 연과 겨룰 정도로 성장하였고, 이후 부왕과 준왕 등의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다. 왕 아래에는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을 두었다. 고조선에는 8조의 법이 있었는데, 이 중 전하는 세 가지 조항을 통해 고조선이 개인의 노동력과 사유 재산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세기경 중국에서 건너온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이후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중계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국의 한이 고조선을 침략하자 고조선은 항쟁 끝에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부여의 성장

기원전 5세기경부터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는 철기 문화4가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더욱 증가하고 집단 간 전쟁이 늘었다. 고조선의 문화가 확산하면서 주변 지역도 빠르게 변화하였다. 특히 고조선의 유민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가 이 지역의 문화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장하였다.

만주 쑹화강의 평야 지대에 자리 잡은 부여는 1세기경부터 왕호를 사용하였고, 왕 아래에 가() 사자 등의 통치 세력이 존재하였다.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를 비롯한 제가들은 사출도라 불리는 지역을 관장하며 독자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이 이끌었던 집단은 왕이 다스린 중앙과 함께 여러 부족의 연맹을 형성하였다.

 

옥저와 동예, 삼한의 성립

함경도와 강원도의 해안 지역에는 옥저와 동예가 성립하였다. 옥저와 동예는 왕이 없었고, 읍군이나 삼로라 불린 군장이 부족을 다스렸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성립하였다. 삼한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한 여러 소국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 각 소국은 신지 읍차 등의 군장이 통치하였고, 천군이라는 제사장이 소도에서 종교 의례를 주관하였다. 이처럼 삼한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였다. 철기 문화가 발달하면서 삼한 사회에서는 변화가 나타났다. 마한 지역은 백제에 통합되었고, 진한 지역에서는 사로국이 신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변한 지역에서는 가야 연맹이 성장하였다.

 

삼국과 가야의 성립

고구려는 부여에서 온 이주민과 압록강 유역의 토착민이 연합하여 졸본 지역에 건국하였다. 산간 지대에 있는 고구려는 주변 소국을 정복하며 평야 지대로 진출하였다. 고구려는 5개의 부()가 연맹하여 발전하였고, 각 부는 각자의 주민과 영역을 다스렸다. 지배층으로 왕과 여러 가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각각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렸다.

백제는 부여와 고구려에서 내려온 이주민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연합하여 성립하였다. 하남 위례성을 수도로 삼은 후 마한의 소국들을 제압하며 성장하였다.

신라는 경주 일대의 6부 연맹에 기초하여 진한의 소국들을 복속시켰다. 신라에서는 4세기 전반까지 박 석 김씨가 왕위를 배출하였고 왕호도 거서간, 차차웅에 이어 이사금을 칭하는 등 왕의 위상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삼국 초기에는 가장 강력한 부의 대표가 왕이 되어 외교권과 군사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각각 부는 왕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고 자치적으로 부를 운영하였다. 국가 중대사는 왕과 부의 대표들이 합의하여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의 제가 회의를 비롯한 삼국의 회의체가 운영된 방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변한 지역에서는 여러 소국이 가야 연맹을 이루었고 3세기경에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연맹을 주도하였다. 금관가야는 5세기경 신라를 지원한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쇠퇴하였고, 이후 고령의 대가야가 연맹을 이끌었다. 가야 연맹은 풍부한 철10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각 소국이 독자적인 권력을 유지하여 지배력을 한데 모으지 못하였고, 백제와 신라의 압력으로 중앙 집권 국가로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