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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5-1. 한강의 기적을 이루다

by 변교수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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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제 성장과 사회 문화의 변화

1990년대 이전에는 편지나 엽서가 중요한 통신 수단이었다. 그 때문에 우편물에 붙이는 우표에는 당시 정부의 주요 정책과 사업을 홍보하는 내용이 담기기도 하였다. 특히 박정희 정부 시기에 발행한 우표를 살펴보면, 1960~1970년대 경제 성장의 모습을 알 수 있다.

 

5-1. 한강의 기적을 이루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신년사에서 일하는 해를 표어로 정하고, 경제 발전에 매진해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하였다. 이 시기 정부는 시책을 선전하고자 건전 가요를 만들어 보급하였는데, 일하는 해에 제작된 음반에는 일하는 즐거움이라는 노래와 악보가 수록되었다. 사실 정부는 1965년에도 일하는 해를 다짐하였었다. 1960년대는 그야말로 경제 성장에 집중한 시기였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

경제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박정희 정부는 장면 정부가 마련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보완하여 국가 주도의 경제 성장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 2차 경제 개발(1962~1971)에서는 의류, 합판, 가발, 신발과 같은 노동 집약적 경공업을 육성하고 수출을 늘리는 데 힘썼다. 그리고 화학 비료, 시멘트, 정유 등 기간산업 육성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울산과 마산에 각각 대규모 산업 단지와 수출 자유 지역을 조성하였고, 원활한 물자 유통을 위해 경부 고속 국도를 개통하였다. 한편, 경제 개발 과정에서 자본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65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여 일본 자본을 유치하고,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획득하여 경제 개발 자금을 확보하였다.

 

1, 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는 동안 한국 경제는 연평균 약 9.2 %의 성장률을 달성하였고, 수출은 약 20배 이상 증가하였다. 그러나 산업 각 분야가 고르게 성장하지 못하였고, 정경 유착2 현상도 심해졌다. 또한, 외채가 빠르게 증가하여 한국 경제가 외국 자본에 의존하는 문제가 나타났다.

 

경부 고속 국도(1970. 7. 7. 준공)

경부 고속 국도의 개통으로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연결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이로 인해 지역 간 불균형 발전을 초래하였다는 비판도 있다.

 

정경 유착 정치 경제 엉기다 붙다

정치권과 경제계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경우를 일컫는다.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1963년부터 1977년까지 8천여 명의 광부가 서독의 석탄 광산에 파견되었고, 1965년부터 1976년까지 1만여 명의 간호사가 서독의 병원에 취업하였다. 이들은 야간 근무를 자청하는 등 고된 노동을 견디며 벌어들인 외화를 고국의 가족에게 보냈는데, 이는 국제 수지를 개선하고 국민 소득을 높이는 등 경제 성장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69년부터 3년간 뒤스부르크 시립 병원 간호조무사로 일하였던 윤모 씨는 그땐 정말 수도 없이 야근했다.”라고 말하였다. 윤 씨는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신생아 병동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먹이고 목욕을 시켰다. 남들이 한 달 700마르크 벌 때 윤 씨는 병원 두 곳에서 야간 근무를 하며 1,200마르크를 벌었다. - 조선일보, 2013. 1.

 

중화학 공업 중심의 고도성장

박정희 정부는 경공업 중심의 경제 성장에 한계를 느끼고 경제 발전 방향을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바꾸었다. 3, 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72~1981)에서는 세제 금융 지원 등을 통한 수출 주도형 중화학 공업화를 목표로 하였다. 정부는 철강, 화학, 비철 금속, 기계, 조선, 전자 등 중화학 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포항에 제철소를 건설하였으며, 울산과 거제 등지에 대규모 조선소를 설립하였다. 또한, 창원, 구미, 울산, 여수 지역에 공업 단지를 조성하였고, 부족한 전력을 마련하기 위해 고리 등지에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였다.

 

1970년대 중화학 공업이 크게 성장하여 이차 산업의 비중이 일차 산업을 능가하고, 중화학 공업 생산액의 비중이 경공업을 크게 넘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산업과 공업 구조의 변화는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이어졌다. 1977년에는 수출액이 100억 달러를 넘어섰고, 1973년에서 1979년 사이에 연평균 8.9%에 달하는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급속한 경제 발전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한국 경제는 제3, 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는 동안 두 차례의 석유 파동으로 위기를 겪었다. 1973년에 발생한 제1차 석유 파동은 중동 건설 사업에서 외화를 벌어들여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8년 제2차 석유 파동으로 한국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세계 경제의 위기 속에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 투자로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고 기업 부담이 늘었다. 기업들이 도산하면서 실업률이 증가하였으며 경제 성장률도 감소하였다. 이러한 경제 불황은 박정희 정부에 정치적 위기로 작용하였다.

 

석유 파동, 한국 경제를 흔들다

1973년에 제4차 아랍 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나자, 석유 수출국 기구(OPEC)는 두 차례에 걸쳐 원유 가격을 크게 올렸다. 이것을 제1차 석유 파동이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한국 경제도 어려움에 직면하였으나 중동 건설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경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2차 석유 파동은 1978년 이란이 원유 수출을 중단하면서 일어났다. 원윳값 상승에 따라 생산비가 늘어나 전 세계는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경기 침체까지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었다. 각국의 경제 성장률이 둔화하였으며, 무역 수지도 악화하였고, 국제 금융과 통화 질서는 혼란에 빠졌다. 수출 산업 중심으로 성장해 오던 한국 경제도 큰 타격을 입어 물가 급등, 수출 신장 둔화, 경기 후퇴 및 실업 증가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

 

1980년대의 경제 변화

1980년대 들어 한국 경제는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 중복 투자와 제2차 석유 파동, 정치적 격변 등으로 마이너스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전두환 정부는 경제 안정화 정책을 통해 이와 같은 경제 위기를 벗어나려 하였다. 부실기업을 인수한 기업에 대해서는 세금과 부채를 감면하거나 저금리 자금을 융자하는 혜택을 주었으며, 국가 주도의 성장 우선 정책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민간 경제가 자율적으로 운용될 수 있도록 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상황을 배경으로 이른바 3저 호황을 맞았다. 이에 따라 원유와 수입 원자재의 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져 외환을 절약하였고, 국제 금리의 하락으로 외채 이자 부담이 줄어들었다. 그 결과 중화학 공업의 과잉 설비와 수출 부진을 해소하고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때 한국 경제는 자동차, 가전제품, 기계, 철강 등 중화학 부문을 주력 산업으로 하여 연평균 성장률이 12%가 넘는 높은 성장을 이루었고, 반도체 산업 등 첨단 산업도 육성하였다. 이로 인해 1980년대 중반 이후 수출액이 300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가계 소득도 꾸준히 증가하여 1980년대 말에는 1인당 국민 소득이 5천 달러를 넘어섰다.

 

1980년대 들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보호 무역을 강화하고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한 개방 압력을 키워나갔다. 1986년에는 자유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세계 각국이 우루과이에서 다자간 무역 협상 개시를 위한 각료 선언(우루과이 라운드)을 발표하였다. 이에 정부는 미국 등의 개방 압력과 우루과이 라운드에 따라 시장과 자본의 전면적인 개방을 서둘렀고, 그 결과 다국적 기업과 국제 금융 자본 등이 국내에 진출하였다.

 

1980년대의 수출과 수입

1986년에는 공식 무역 통계를 낸 이래 처음으로 무역 수지에서 흑자를 냈으며, 1989년까지 4년 동안 흑자 시대를 보냈다.

 

우루과이 라운드(UR)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의 다자간 무역 협상으로, 농산물 지적 재산권 서비스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

 

경제 성장 과정의 문제점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는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으로 많은 문제가 나타났다. 각 산업 분야가 고르게 성장하지 못하였고, 원자재, 시설, 자본, 기술 등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제 개발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외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아졌다. 또한, 외자 도입에 따라 외채가 증가하여 외채 상환 시기에 경제 위기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정부의 대기업 육성 정책에 따라 한 기업이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8이 등장하여 재벌 중심의 산업 구조로 바뀌어 갔다. 재벌은 경제 성장 과정에서 정부의 산업 육성 및 수출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등 긍정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권과의 유착을 통해 부패 구조가 더욱 커졌고, 기술 개발보다 사업의 확장을 통해 경제 구조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하면서 부실기업이 생기기도 하였다. 한편, 정부의 공업 중심 경제 개발 추진에 따라 산업 불균형이 심화하였다. 수출 상품의 가격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 저임금 저곡가 정책 9을 추진하면서 노동자와 농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더욱 커졌다. 특히 성장 중심의 경제 정책이 추진되면서 고른 소득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아 부의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저임금 저곡가 정책

국가 권력이 수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저임금 정책을 지속하고자 농산물 가격을 인하한 정책이다.

 

재벌 재물

벌큰 세력을 지닌 독점적 자본가나 기업가 집단 혹은 일가친척으로 구성된 자본가 무리 등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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