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5-3. 대중문화가 성장하다

by 변교수 2023. 6. 25.
반응형

5-3. 대중문화가 성장하다

1961년 텔레비전 방송국이 설립되고, 1966년 최초의 국산 흑백텔레비전이 등장하였다. 텔레비전은 가족이 공유하는 대중 매체로, 온 가족이 둘러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텔레비전 보급 초기에는 동네 사람들이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 모여 방송을 함께 시청하기도 하였다.

대중문화가 성장하다

 

교육의 변화

광복 이후 교육은 질적 양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다.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 시기에 교육 자치제가 시행되었으나, 5·16 군사 정변 이후에는 교육에 대한 중앙 통제가 심화하였다.

이에 따라 학교에서는 군사 교육과 반공 교육 등 국가주의 교육을 강화하였다. 유신 체제 시기에는 국사 교육을 강화하고, 새마을 교육도 실시하였다.

 

전두환 정부는 국민 윤리 교육을 강조하고 평생 교육을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는 도서 벽지 중학교에서 의무 교육을 시작하였으며, 교육 개혁 심의회를 설치하여 교육 발전 계획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높은 교육열은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었지만, 입시 경쟁과 사교육비 증가 등의 문제를 가져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1969년부터 중학교 무시험 진학 제도를 실시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고교 입학시험을 연합고사로 바꾸고, 고교 평준화 제도를 시행하였다. 1981년에는 과외 전면 금지와 대학 졸업 정원제를 시행하여 높은 교육열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고자 하였다.

 

이후에도 교육은 양적으로 더욱 성장하여 대학교와 전문 대학이 많이 늘어났다. 교육에 대한 투자는 인적 자본으로 축적되어 경제 성장으로 이어졌고, 교육 기회의 확대는 국민에게 건전한 시민 의식을 함양하여 정치 민주화에 기여하였다.

 

국가주의 교육을 강화하다

박정희 정부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을 희생하는 국가주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국민 교육 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 등을 제정하여 학생들에게 암송하도록 강요하였다. 대통령령으로 반포된 국민 교육 헌장을 각 교과서의 첫머리에 기재하였고, 학생들은 이를 의무적으로 암기해야 했다. 또한, 정부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학도 호국단을 설치하고 교련 과목을 신설하는 등 군사 교육을 하였다.

 

이러한 국가주의 정책은 학교뿐만 아니라 공공장소에서도 시행되었다. 길을 가다가도 오후 6시가 되면, 그 자리에서 서서 국기 하강을 알리는 애국가에 맞춰 차렷 자세를 하거나 국기를 향해 경례하도록 하였다.

 

언론 활동의 성장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등 다양한 언론 매체의 발달은 민주화의 진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정권에 의해 언론이 통제되기도 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언론 탄압을 강화하면서 정부에 비판적인 경향신문을 폐간하였다.

 

4·19 혁명 직후에는 신문에 대한 발행 허가제가 폐지되면서 언론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 이후 집권한 박정희 정부가 언론 규제를 강화하고, 일부 언론을 폐간하여 신문사가 크게 줄어들기도 하였다. 이 무렵 KBS, MBC, TBC 등이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면서 텔레비전이 점차 주요 매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유신 체제 성립 이후에는 비판적 언론인들을 구속 해직하고 기자 등록제인 프레스 카드제를 실시하여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기자의 활동을 제한하였다. 이러한 언론 통제에 대항하여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 언론 실천 선언을 발표하면서 언론 자유 운동이 확산되었다. 1980년대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도 언론을 통제하여 정부 비판적인 언론인을 해직하고 언론사를 통폐합하였다. 그리고 보도 지침을 통해 기사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언론 규제는 6월 민주 항쟁 이후 완화되어, 한겨레신문이 창간되고 전국 언론 노동조합 연맹이 조직되는 등 언론의 자유가 크게 확대되었다.

 

언론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

 

자유 언론 실천 선언(1974. 10. 24.)

1. 신문 잡지 방송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2. 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한다.

3.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거부한다. 불법 연행을 자행하는 경우 기자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는다.

 

정부의 압력으로 백지가 된 동아일보 광고면을 메운 글(1975. 1.)

이겨라! 동아 - 청담동 복덕방 14

동아일보 보는 재미로 세상 산다. - 서점 주인 11

술 한잔 덜 먹고 여기에 내 마음 담는다. - 드라이브맨 안 24

빛은 어두울수록 더욱 빛난다. - 동아일보를 아끼는 한 소녀 13

동아!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 갈 거야. - 대학생 S 18

약혼했습니다. 우리 2세가 태어날 때 아들이면 동아, 딸이면 성아’(여성동아)로 이름을 짓기로 했습니다.

   - 이묵과 오희 20

 

대중문화의 성장

경제 성장과 함께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은 대중 매체가 널리 보급되면서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다. 1960년대에는 노래와 영화 등 대중문화가 널리 확산되었다. 특히 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에 따라 영화관 수가 크게 늘고 영화 제작 편수도 급증하였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문화, 예술에 대한 검열과 통제를 강화하였다. 수많은 금서와 금지곡을 지정하였으며, 방송에서는 반공 의식을 고취하거나 정부 정책을 홍보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도록 하였다. 당시 극장에서는 영화 관람 전에 정부 홍보용 대한 뉴스를 상영하였다.

 

한편, 텔레비전을 보유한 가정이 늘어나면서 텔레비전을 통해 소개된 대중가요, 코미디가 유행하였고, 텔레비전 드라마가 인기를 끌어 영화에 관한 관심이 다소 줄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과 유럽의 반전 저항 문화가 유입되어 장발, 청바지, 통기타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가 널리 퍼졌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면서 프로 야구를 시작으로 상업적 프로 스포츠 시대가 열렸지만, 언론과 문화 통제는 여전하였다. 한편으로는 음악, 미술, 영화, 연극 등 여러 분야에서 민주화와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민중 문화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언론과 대중문화에 대한 통제는 6월 민주 항쟁으로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였다.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1973)

박정희 정부는 귀를 덮는 긴 머리와 무릎 위 17cm 이상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람을 경찰이 단속할 수 있게 하였다.

 

프로 야구 개막(1982)

전두환 정부는 야구, 축구, 씨름 등에서 프로 스포츠를 잇달아 출범시켰다.

 

대중음악에 담긴 시대를 공감하다

대중음악은 그 시대의 상황과 정서를 반영한다. 시기별 특징과 당시의 대표작을 통해 한국 대중가요에 담긴 1960~1980년대의 사회 모습을 살펴보자.

 

1960년대, 트로트가 유행하다

일본 대중가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트로트는 고향이나 임을 잃은 상실감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부분이 많은 이의 공감을 사면서 트로트는 대중가요의 한 갈래로 토착화되었다. 특히 1964년에 발표된 동백 아가씨는 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1970년대, 록과 포크에 청년들의 목소리를 담다

기존 음악에 대한 저항을 바탕으로 한 로큰롤은 줄여서 록이라고도 불린다. 록의 대표 주자였던 신중현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커피 한 잔, 월남에서 온 김상사, 거짓말이야등 한국적 정서를 담은 록 음악을 발표하여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포크는 통기타를 치면서 사회와 국가의 부조리와 모순을 노래하는 음악이었다. 한국에서의 포크도 기성세대의 질서와 관행에서 벗어나려 한 1970년대 청년 문화를 잘 보여 주었다. 1970년대에는 유신 체제 속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정부 통제가 강화되었다. 특히 1975년에는 국가 안보 우려, 일본풍, 비판적인 가사, 선정 퇴폐적인 분위기 등을 이유로 220여 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미인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가사가 퇴폐적이어서, 거짓말이야는 불신감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1980년대, 다양한 음악 장르가 공존하다

1980년대에는 청소년층이 대중가요의 주된 소비층으로 등장하면서 방송 매체나 음반 시장이 활성화되었다. 당시에는 팝, 발라드, 트로트, 댄스 음악 등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였다. 특히 조용필, 이선희, 주현미, 박남정, 김완선 등이 활발히 활동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