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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4-4.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다

by 변교수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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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다

19805, 18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지역에 근무했던 경찰관의 근무 일지에는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의 진행 양상과 경찰의 대응, 사용 물품, 부상자, 계엄군의 개입 등이 요일별, 시간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51816, 광주 한일은행 사거리에 공수단 도착 진압등의 메모는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다

 

신군부의 등장과 서울의 봄

10·26 사태 이후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통일 주체 국민 회의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국민 사이에서는 유신 체제가 끝나고 민주 사회가 올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며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확산하였다. 그러나 19791212,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주도하는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권을 장악하였다(12·12 사태).

 

신군부는 계엄령을 계속 유지하고 헌법 개정을 지연하며 정치 개입을 본격화하였다. 그러자 학생과 민주 인사들은 신군부 퇴진, 계엄령 철폐, 유신 헌법 폐지 등을 요구하며 19805월까지 지속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펼쳤다( 서울의 봄). 그러나 신군부는 5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였다. 또한, 국회와 대학을 폐쇄하고, 민주화 운동 세력과 신군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서울의 봄

1980년 봄부터 대학가에서는 자율화 바람이 불었으며, 이는 정치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80515,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의 학생과 시민이 서울역 앞에 모였다.

 

멕시코와 타이의 민주화 운동은 어떠하였을까?

1968년 멕시코의 구스타보 군사 정부는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올림픽을 이용하였다. 멕시코 올림픽을 열흘 앞둔 1968102일 멕시코시티에서 멕시코 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교육 제도의 민주화와 자유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정부는 무장 헬기와 장갑차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한편, 타이에서는 1973년 타놈의 군부 독재에 저항하여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타놈이 시위를 진압하고자 발포 명령을 내려 많은 사람이 희생되자 타이 국왕은 극심한 대립을 막기 위해 서로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후 타놈이 국외로 도주하면서 항쟁은 마무리되었다.

 

5, 18 민주화 운동

1980518, 전라남도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와 휴교령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신군부는 공수 부대원을 투입하여 시위를 벌이던 전남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다.

 

521일 계엄군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경찰서, 예비군 무기고 등에서 획득한 무기로 무장하고 시민군을 조직하였다. 계엄군은 언론을 통제하여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가는 한편,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시내로의 진입과 통신을 차단하였다.

 

광주 시민들은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수습 위원회를 조직하고 구속자 석방과 비상계엄 철폐 등을 조건으로 협상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신군부는 항쟁을 조기에 진압하여 전국에 파급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527일 새벽,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하여 전남 도청의 시민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고 518 민주화 운동은 많은 시민의 희생 속에 끝이 났다.

 

신군부에 저항한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대 이후 전개된 민주화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필리핀, 타이완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5, 18 민주화 운동 기록물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국내 언론

광주 사태 10일 만에 진압되어 평정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

광주 사태는 극렬한 폭도들에 의해 악화되는 조짐이 보였다. 따라서 군은 생활고와 온갖 위협에 시달리는 시민 구출을 위해 군 병력을 광주에 투입하였다. - 1980527KBS 9시 뉴스

 

광주 시민군의 궐기문(1980. 5. 25.)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 정부 당국에서는 17일 야간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일부 학생과 민주 인사, 정치인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구실로 불법 연행하였습니다. ...... 20일 밤부터 계엄 당국은 발포 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고장을 지키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민주 시민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 신동아, 19901월호

 

신군부의 집권

5 18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전두환을 상임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를 설치하여 국정을 장악하였다.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는 사회 정화를 명분으로 많은 사람을 삼청 교육대로 끌고 가 군대식 훈련과 노동을 강요하였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고 통일 주체 국민 회의를 통해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1980). 이후 신군부는 새로운 헌법을 마련하여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하고,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민주 정의당을 창당한 전두환은 다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981. 2.).

 

전두환 정부는 안정적인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사회 전반에 걸쳐 강압 정치를 펼쳤다. 여러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보도 지침 등을 통해 기사 내용을 검열 단속하였다. 또한,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 등 민주화의 요구를 철저히 탄압하였으며,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입 본고사 폐지와 과외 금지, 중고생의 두발과 교복 자율화, 야간 통행금지 해제, 해외여행 자유화, 프로 스포츠 육성 등의 유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임기 중에 각종 권력형 부정과 비리 사건이 연이어 터져 전두환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불만이 높아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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