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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인도와 중국에서 문명이 일어나다

by 변교수 2023.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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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도와 중국에서 문명이 일어나다

인도 문명

인더스강 상류 주변의 기름진 평야 지대에서는 일찍부터 농경이 발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2500년경 하라파, 모헨조다로 등에서 발달된 도시 문명이 일어났다. 이 도시들은 계획도시로서 포장 도로, 주택, 하수 시설, 공중목욕탕과 집회소 등을 갖추었다. 인도 문명 사람들은 청동기와 채도, 상형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밀과 보리를 재배하고 가축을 길렀다. 이들은 선박과 수레를 만들어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교류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유적에서 발견된 인장과 토기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기원전 1500년경 중앙아시아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아리아인은 인더스강 유역으로 남하하여 서북 인도 지방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기원전 1000년경에는 동쪽의 갠지스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철제 도구를 이용해 토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도시를 건설하고 국가를 형성하였다.

아리아인은 정복지의 원주민을 지배하기 위해 신분 제도인 카스트(바르나)제를 만들었다. 지배 계급인 브라만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태양, , 불과 같은 자연 현상을 신격화하고 복잡한 제사 의식을 발전시켜 제사를 독점적으로 주관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브라만교가 성립하였고, 자연 현상을 찬미하는 노래인 베다는 이후 브라만교의 경전이 되었다.

 

◼ 카스트제로 나누어진 신분

카스트란 포르투갈어로 혈통또는 신분을 의미하며, 19세기 영국인들이 인도를 식민 지배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은 브라만을 중심으로 카스트제를 파악하였다. 한편, 인도에서는 카스트를 산스크리트어로 이라는 뜻의 바르나라고 불렀는데, 이는 아리아인과 원주민의 피부색이 다른 데서 유래하였다.

카스트(바르나)제는 혈통으로 결정된 신분에 따라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생활 방식까지 규제하였다. 인도 경전 베다에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네 신분이 설명되어 있어 아리아인들은 베다를 근거로 카스트제를 합리화하였다.

 

중국 문명

중국에서는 기원전 8000~기원전 6000년경 황허강 유역과 랴오허강, 창장강 유역에서 신석기 문화가 발달하였다. 이 중 황허강 유역의 초기 유적인 양사오에서는 채색 토기인 채도가, 후기 유적인 룽산에서는 검은색 토기인 흑도가 제작되었다.

기원전 2500년경부터는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황허강 중류의 황토 지대에서 초기 국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특히, 얼리터우 지역에서 궁전 유적과 청동기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두고 중국 기록상 최초의 왕조인 ()’ 왕조가 실존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기원전 1600년경에는 황허강 중류 지역에서 상() 왕조가 출현하였다. 상은 성벽이 있는 도시인 읍()들이 다수 연합하여 이루어졌다. 상에서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점을 쳐서 결정하는 신권 정치를 실시하였다. 점친 내용과 결과를 기록하는 데는 갑골문이 쓰였는데, 이 문자는 오늘날 한자의 기원이 되었다.

상에서는 주로 청동으로 무기와 제기를 만들고 석기와 나무로 농기구를 만들었다. 또한 해와 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역법을 만들었으며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제사와 농사에 도움이 되었다. 한편, 당시에는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을 함께 묻는 순장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 신의 이름을 빌려 통치하다

상 왕조 사람들은 왕이 신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나라의 일을 처리할 때 정인(貞人)이라 불린 점술사의 도움을 받아 점을 치고 신의 뜻을 해석하였다. 점괘와 관련된 내용은 전쟁, 날씨, 한 해 농사의 수확, 국왕의 제사, 사냥, 질병 등 매우 다양하였다.

정인은 거북의 배딱지나 소의 어깨뼈에 구멍을 뚫고 불을 놓아 생긴 균열을 보고 점을 쳤고, 점괘가 어떠했는지를 뼈 위에 기록하였다. 이때 사용된 문자는 거북의 배딱지를 나타내는 ()’자와 짐승의 어깨뼈를 표현한 ()’자를 합하여 갑골문이라고 불렀다. 상 왕조는 점괘를 기록한 갑골을 보관하는 일을 전담하는 관리를 두어 이를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주 왕조와 봉건제

상의 서쪽에서 일어난 주()는 기원전 11세기경에 상을 멸망시키고 호경에 도읍을 정하여 황허강 유역을 지배하였다. 그리고 영토를 창장 강 하류까지 확대하였다.

주는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수도 부근만 왕이 직접 다스리고, 나머지 지역은 왕실의 친족과 공신을 제후로 삼아 이들에게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는 봉건제를 실시하였다. 이 제도에 따라 제후는 지급받은 토지에서 사실상 왕과 같은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그 대신 제후는 왕에게 조공을 바치고 외적이 침입했을 때 군사를 동원하여 왕실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봉건제는 적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하는 종법제에 바탕을 두고 운영되었다.

주 왕실은 하늘이 천하를 지배할 능력과 덕을 갖춘 인물을 선택하여 권력을 맡긴다는 천명사상을 토대로 군주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하였다. 이와 함께 덕으로 백성을 감화하여 다스린다는 덕치주의를 내세웠다. 이 사상은 이후 중국의 통치 이념으로 계승되었다.

기원전 8세기경 주는 유목 민족의 침입을 받아 수도를 서쪽의 호경에서 동쪽의 낙읍(뤄양)으로 옮겼는데, 수도가 서쪽에 있었을 때를 서주, 동쪽으로 옮긴 뒤를 동주라고 한다. 동주 시대에는 주 왕실의 권위가 급격히 약해졌고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면서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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