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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140

[한국사의 창] 1-3.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1-3.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한 신문에 좌우 합작을 풍자하는 만평이 실렸다. 손을 잡으며 뜻을 같이하려는 여운형과 김규식을 양 끝에서 극좌 세력과 극우 세력이 잡아당기고 있었는 데 당시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장한 좌우 합작에 의한 민족 국가 건설은 대중에게 큰 지지를 얻었지만, 대부분의 정치 세력은 이에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우호적이지 않았다. 좌우 합작 운동의 전개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이승만이 통일 정부 수립이 어렵다면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 정읍 발언’을 발표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가운데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 세력은 한반도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다. 미 군정의 지원과 대중적 지지 속에 결성된 좌우 합작 위원회.. 2023. 6. 25.
[한국사의 창] 1-2. 광복 후 정부 수립 논의를 시작하다 1-2. 광복 후 정부 수립 논의를 시작하다 광복 이후 국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입국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은 귀국 환영식에서 큰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미 군정은 한국인이 만든 행정 기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임시 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으며, 인민 위원회도 주체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웠다. 8·15 광복과 국토 분단 1945년 8월 15일, 일본 국왕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은 연합군의 승리로 얻은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의 끈질긴 독립운동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국내 진공 작전 등과 같은 독립운동 세력의 노력이 무산되면서 자주적 정부 수립도 어려.. 2023. 6. 25.
[한국사의 창] 1-1. 냉전 체제가 형성되다 Ⅵ 대한민국의 발전 냉전 체제 속에서 남에는 대한민국 정부, 북에는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다. 우리나라는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동시에 이루었다. 이후 높아진 국제 위상을 바탕으로 다양한 지원 활동을 벌이며 국제 사회에 이바지하는 한편, 분단된 남과 북은 교류 협력하며 통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1.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 2.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3. 6·25 전쟁과 남북 분단의 고착화 4. 4·19 혁명과 민주화를 위한 노력 5. 경제 성장과 사회 문화의 변화 6. 6월 민주 항쟁과 민주주의의 발전 7. 외환 위기와 사회 경제적 변화 8. 남북 화해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노력 1.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 2023. 6. 25.
[한국사의 창] 6-3. 건국을 준비하다 6-3. 건국을 준비하다 1940년 9월, 중국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에는 남성 대원뿐만 아니라 여성 대원도 있었다. 오광심, 조순옥, 김정숙, 지복영이 여성 대원으로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주로 총사령부의 비서 업무와 선전 사업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의 역량 집중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와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의 통합 회의가 결렬된 이후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 등 3개 정당은 1940년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었다. 1940년 9월, 중국 국민당을 따라 충칭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또한, 이전의 집단 지도 체제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석 중심의 단일 지도 체제를 마련하고 김구.. 2023. 6. 24.
[한국사의 창] 6-2.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6-2.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38년에 창설된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 최초의 한국인 무장 부대로, 창설 당시에는 200여 명으로 된 두 개의 부대였으나, 1940년에는 300여 명으로 늘었다. 당시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된 한국인 병사들은 부대를 탈출하여 조선 의용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한인 애국단의 활동 국민대표 회의(1923)가 성과 없이 끝난 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더욱이 만보산 사건으로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중국 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졌다. 그러던 중 김구는 1931년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침체된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하였다. 한인 애국단원 이봉창은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일본 국왕이 타고 가는 마차를 향해 .. 2023. 6. 24.
[한국사의 창] 6-1.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다 6. 광복을 위한 노력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은 일제의 침략 전쟁이 확대되자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여 연합군과 공동 작전을 벌였다. 한국광복군 부대원들은 태극기에 자신의 이름을 적거나 ‘굳세게 싸우자, 자유를 찾자.’ 등과 같은 글귀를 적어 독립에 대한 결의와 항일 투쟁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6-1.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다 ‘동무야 잘 싸웠다 / 조선의 혁명군 / 총 끝에 번갯불이 반짝거리어 / 악마의 왜놈들을 쳐부수던 밤 / 악마의 왜놈들을 쳐부수던 밤’ 이 노래는 1930년대 조선 혁명군이 부르던 군가로, 일제에 맞선 조선 혁명군의 항일 투쟁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양세봉이 이끈 조선 혁명군은 1929년에 결성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부터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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