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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297

[한국사의 창] 3-2. 전후 독재 체제를 강화하다 3-2. 전후 독재 체제를 강화하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 보자.’, ‘갈지 못하면 살 수 없다.’ 등의 구호를 내세워 이승만 정부에 실망한 국민의 호응을 얻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갈아 봤자 더 못산다.’, ‘구관이 명관이다.’, ‘나라 위한 한평생 합심하여 또 모시자.’ 등의 구호를 내걸고 민주당에 맞대응하였다. 주제 반공주의와 독재 6·25 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앞세워 정권 연장에 힘썼다. 전쟁 직전 치러진 제2대 국회 의원 선거1에서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대통령 간선제로는 다시는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직선제 개헌을 시도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1952년 5월 부산 일대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 2023. 6. 25.
[한국사의 창] 3-1. 6·25 전쟁이 일어나다 3. 6·25 전쟁과 남북 분단의 고착화 6·25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남겼다. 이러한 민족의 애환은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의 여러 노래에 담겼다. 「굳세어라 금순아」 는 1950년 12월 당시 흥남 부두의 철수 과정에서 헤어진 가족에 대한 애타는 심정을 나타냈으며, 「이별의 부산 정거장」 은 전쟁을 피해 부산에서 임시로 거주하는 피란민의 심경을 표현하였다. 3-1. 6·25 전쟁이 일어나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가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드는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1950년 8월, 학도 의용군 이우근이 쓴 이 편지에는 전장 한가운데 있는 소년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6.. 2023. 6. 25.
[한국사의 창] 2-2. 친일파 청산과 농지 개혁을 추진하다 2-2. 친일파 청산과 농지 개혁을 추진하다 이광수는 “동경까지 가서 학병을 강요한 것은 학병을 나가지 않으면 학병을 나가서 받는 것 이상의 고생을 할 것 같기에 나가라고 권하였다.”라고 1949년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취조실에서 말하였다. 이광수 외에도 박흥식, 노덕술, 김연수, 최남선, 최린 등이 반민 특위에 체포되었다. 당시 시민들은 이러한 반민 특위의 활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반민족 행위자 처벌을 위한 노력 광복 이후 일제의 식민 지배에 협력하였던 친일파를 청산하는 일은 사회 정의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 군정의 친일 관료 유지 정책으로 인해 즉각적인 친일파 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헌 국회는 일제 강점기의 반민족.. 2023. 6. 25.
[한국사의 창] 2-1.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다 2.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앞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과 광복 3주년 기념식을 경축하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행사장에서는 애국가 제창과 국기 게양이 이어졌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연단에 올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수립되었음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거리 양측에 늘어선 군중들은 기념식 실황 방송에 맞추어 만세를 불렀고, 행사가 끝난 뒤에는 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시가 행렬에 박수를 보냈다. 2-1.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다 “작대기 하나 아무개 후보입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1948년 당시에는 문맹자가 많아 선거 홍보 포스터는 물론 투표용지에도 국회 의원 후보자 기호를 ‘작대기’로 표기하였다. 많은 후보자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호를 작대기 개수로 알리며 .. 2023. 6. 25.
[한국사의 창] 1-3.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1-3.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한 신문에 좌우 합작을 풍자하는 만평이 실렸다. 손을 잡으며 뜻을 같이하려는 여운형과 김규식을 양 끝에서 극좌 세력과 극우 세력이 잡아당기고 있었는 데 당시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장한 좌우 합작에 의한 민족 국가 건설은 대중에게 큰 지지를 얻었지만, 대부분의 정치 세력은 이에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우호적이지 않았다. 좌우 합작 운동의 전개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이승만이 통일 정부 수립이 어렵다면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 정읍 발언’을 발표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가운데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 세력은 한반도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다. 미 군정의 지원과 대중적 지지 속에 결성된 좌우 합작 위원회.. 2023. 6. 25.
[한국사의 창] 1-2. 광복 후 정부 수립 논의를 시작하다 1-2. 광복 후 정부 수립 논의를 시작하다 광복 이후 국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입국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은 귀국 환영식에서 큰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미 군정은 한국인이 만든 행정 기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임시 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으며, 인민 위원회도 주체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웠다. 8·15 광복과 국토 분단 1945년 8월 15일, 일본 국왕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은 연합군의 승리로 얻은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의 끈질긴 독립운동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국내 진공 작전 등과 같은 독립운동 세력의 노력이 무산되면서 자주적 정부 수립도 어려..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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